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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아홉 암자 창성사의 몰락 미스터리

고려시대의 고승 진각국사탑비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경기헤드라인=문수철 기자]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국교가 불교인 고려시대에 왕건과 인연을 맺고 중창되었다는 수원 ‘창성사’는 팔십아홉개의 암자를 자랑할 만큼 대형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희미해 사찰의 원래 터전마저 불분명하다.

창성사지는 현재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위치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곳이 정확한 창성사지가 맞는지는 이견이 분분하다. 수원시가 지정한 창성사지는 대략 1650㎡ 정도의 크기이며, 수풀이 우거진 그곳엔 장대석과, 기단석, 주초석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원이 이곳을 창성사지의 주 본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곳에서 창성사에서 입적했다는 진각국사의 탑비와 기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수원시가 지정한 창사지터

진각국사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록상으로만 본다면 진각국사는 충렬왕 33년에 출생해 13세에 화엄종반용사에 들어가 19세에 상풍선에 오른 고려말 화엄종 사로서 왕은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진각국사의 탑비는 고려 우왕 12년 수원 광교산에 세워졌으나 지난 1965년 수원 화홍문 옆으로 탑비가 옮겨졌으며, 탑비가 창성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화홍문 옆으로 옮겨진 진실에 대해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다만 수원시는 관리 차원에서 옮겼다고 하지만 관리가 안 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 수원 화홍문 옆의 진각국사탑비, 보물 14호의 관리 치고는 너무나 허술하다.
    그리고 안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어 수원시가 일부러 역사적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생각이 생각이 들 정도이다.


창성사는 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까?

여든 아홉 개의 암자가 있었다는 수원 창성사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한 설이 없어 추측으로만 사라진 이유에 대해 추정해 볼 뿐이다. 먼저 창성사의 위치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에 있었기 때문에 점령군이 사용하면서 폐사되었다는 추정을 해볼 수 있으며, 이후 조선정부의 억불정책과 국력이 창성사를 재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수원 창성사는 광교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광교산은 백두대간 13정맥 중 하나인 한남정맥(漢南正脈)의 주봉(主峰)이며, 수원시, 용인시, 의왕시, 성남시에 걸쳐있는 높이 582m의 산으로 4개 시를 아우르는 명산이다.

광교산에서 용인을 넘어가면 바로 코앞에서 남한산성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치욕적인 패배로 기록되는 전투가 광교산을 중심으로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 6만이 일본군 1,600명에게 대패해 피가 산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산항에 상륙한 왜군이 20여일 만에 한성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몰려 올랐다. 선주는 의주로 피난길로 접어드는 시점에 피해가 적었던 전남지역에서 군사들을 모아 왕을 구출하기위해 수원까지 도착해 광교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상으로만 본다면 당시 권율의 삼천 군대만 세마대(오산, 독산성)로 도주해 성문을 지켰으며 용인에서 광교산을 넘어 내려온 왜군이 승려들을 그대로 두었을 리 없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승병들의 출정도 있었기에 대형사찰은 왜군의 목표가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때 창성가 폐사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로는 병자호란 당시의 전투상황 때문에 창성사가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고립되자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각각 군사를 모아 인조가 고립된 남한산성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경상감사가 이끈 4만의 조선 군대는 광주 쌍령에서 청군 300에게 대패하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긴다.

반면 호남병마절도사 김준룡 장군은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갇히게 되자,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10여일 만에 광교산에 이르러 진을 치고, 청군을 맞아 격전을 벌인 끝에, 청 태종의 사위 양길리(樣吉利(백양고라(白羊高羅))를 포함한 3명의 적장을 사살했으며, 그 기세를 타고 적의 유격 기병대를 격파했다. 이때 적의 목을 벤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준룡 장군은 두 번에 걸친 청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했으나 조선군의 사망자도 많아 수원으로 철수 했다. 이후 광교산은 청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광교산의 중턱에 자리 잡았던 창성사가 온전히 보존되기는 참으로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인조가 고립되었을 당시 승군의 출정도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광교산 중심에 여든 아홉의 암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창성사가 제 모습을 간직하기는 참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용인 '서봉사지'의 '현오국사비'를 보면 수많은 석재들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석재들을 지금은 광교산 일부에서만 볼 수 있다.


지막으로 창성사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워진 이유는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축성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축조하면서 축조에 필요한 석재들은 수원화성의 여기산 및 광교산에서 가져다썼다고 한다. 여든아홉의 암자가 있었다는 광교산은 충분히 많은 다듬어진 돌들이 있었으며, 이것들은 수원화성의 축조로 인해 옮겨졌으리라고 본다. 이때 성의 축조를 지휘했던 채제공이 전승의 소식을 듣고 전승비를 세웠다는 것만 보아도 창성사를 뒷받침 했던 석재의 사라짐은 조금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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